누구나 늙기 마련이다. 인간은 생물이기에 변화하고 늙어간다. 그렇기에 선인들은 항상 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늙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는 때를 염두하고 현실에서 충실하기를 말씀으로 남겼나 보다.
시쳇말로 서른 고비, 마흔 고비라고 한다. 그 때 그 때 웃으며 넘기지만 매일 아침 몸이 무거운 나를 보면 웃을 일이 아니다. 요인은 많겠지만 확실한 것은 나이임이 명약관화하다. 물론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몸소 느낄 정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도시에서의 삶이 나를 더 늙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은 빼지 말아야겠지만...
농학을 배우기 위해 식물 그리고 생물도 배웠는데 늘 까먹는다. 우리 인간도 생태계의 생물의 범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떨어지는 낙엽이 눈으로는 아름다워보일지 몰라도, 식물생리학적 과정을 지켜보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몸뚱아리는 다년생이라서 내년을 위해 동면의 과정을 준비하고, 쓸데없는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잎에는 낙엽을 촉진하는 독극물인 호르몬을 보낸다. 그리고 잎은 더 살아도 될 것 같지만, 나무에게 배신을 당하고 낙엽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이 잎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일 년, 이 년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나무의 양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잎은 언제 떨어질지 생각도 못하고, 배신을 당했음에도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불의의 사고만 아니라면 언제 떨어질지 알 수도 있고, 조금만 생각하면 그런 배신은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전제임에 틀림없지만, 수동이나 능동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답을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동으로? 능동으로? 어차피 떨어질 낙엽인데 그냥 시간을 기다릴까 혹은 적어도 떨어지는 위치와 시간을 내가 선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서로의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삶이다. 또한 사회 속에서 그저 흝날리는 수많은 존재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한번의 롤플레잉게임을 하듯 내 인생을 내가 그려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즐겁지 아니할까?
시쳇말로 서른 고비, 마흔 고비라고 한다. 그 때 그 때 웃으며 넘기지만 매일 아침 몸이 무거운 나를 보면 웃을 일이 아니다. 요인은 많겠지만 확실한 것은 나이임이 명약관화하다. 물론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몸소 느낄 정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도시에서의 삶이 나를 더 늙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은 빼지 말아야겠지만...
농학을 배우기 위해 식물 그리고 생물도 배웠는데 늘 까먹는다. 우리 인간도 생태계의 생물의 범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떨어지는 낙엽이 눈으로는 아름다워보일지 몰라도, 식물생리학적 과정을 지켜보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몸뚱아리는 다년생이라서 내년을 위해 동면의 과정을 준비하고, 쓸데없는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잎에는 낙엽을 촉진하는 독극물인 호르몬을 보낸다. 그리고 잎은 더 살아도 될 것 같지만, 나무에게 배신을 당하고 낙엽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이 잎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일 년, 이 년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나무의 양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잎은 언제 떨어질지 생각도 못하고, 배신을 당했음에도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불의의 사고만 아니라면 언제 떨어질지 알 수도 있고, 조금만 생각하면 그런 배신은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전제임에 틀림없지만, 수동이나 능동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답을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동으로? 능동으로? 어차피 떨어질 낙엽인데 그냥 시간을 기다릴까 혹은 적어도 떨어지는 위치와 시간을 내가 선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서로의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삶이다. 또한 사회 속에서 그저 흝날리는 수많은 존재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한번의 롤플레잉게임을 하듯 내 인생을 내가 그려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즐겁지 아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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